오에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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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에이의 난은 1399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유력 슈고 다이묘 오우치 요시히로 사이에 일어난 반란이다. 요시미쓰가 쇼군 권력 강화를 위해 오우치 씨를 견제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요시히로는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결탁하여 거병했다. 사카이 전투에서 오우치 군은 막부군에 포위되어 패배했고, 요시히로는 전사했다. 이로 인해 오우치 씨는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이후 오히로미의 활약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이 사건은 군기물어인 『오에이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소설로도 다루어졌다.
무로마치 막부 초기, 쇼군의 권력은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연합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약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쇼군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나노고쇼를 짓고 자신의 직할군인 호코슈를 늘렸다. 또한 유력 슈고 다이묘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오에이 6년(1399년) 10월 3일, 오우치 요시히로는 군사를 이끌고 이즈미 국 사카이 포구에 도착했다.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요시히로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보내 교토로 올 것을 재촉했으나, 요시히로는 이를 거절했다. 10월 27일, 요시미쓰는 젯카이 츄신을 다시 파견하여 설득하려 했다.[6]
2. 배경
고랴쿠 원년(1379년) 호소카와 씨와 시바 씨 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실각시키는 고랴쿠 정변을 일으켰고, 고오 원년(1389년)에는 도키 야스유키를 도발하여 거병하게 한 후 진압 (도키 야스유키의 난) 하였다.
메이토쿠 2년(1391년)에는 11개 구니의 슈고를 겸임하며 '로쿠분노이치도노'(六分の一殿)라 불리던 야마나 씨를 분열시키고, 야마나 도키아키와 우지유키 형제를 일족인 우지키요와 미쓰유키를 시켜 제거했다. 이후 도키아키와 우지유키를 사면하고 우지키요와 미쓰유키를 도발하여 거병하게 한 후 멸망시켰다. 이로써 야마나 씨는 3개 구니만 남게 되었다. (메이토쿠의 난)
2. 1. 무로마치 막부 초기 권력 구조
일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군(将軍)은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연합으로 옹립된 존재였고, 그 권력은 약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는 쇼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노고쇼(花の御所)를 짓고 권세를 보였으며, 직할군인 호코슈(奉公衆)를 증강하였다.
또한 요시미쓰는 유력 슈고 다이묘들에 대한 약체화를 도모하여 고랴쿠(康暦) 원년(1379년)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시바 씨(斯波氏)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를 실각시키는 고랴쿠 정변(康暦の政変)을 일으켰다. 고오(康応) 원년(1389년)에는 도키 야스유키(土岐康行)를 도발하여 거병하도록 부추겼는데, 이는 도키 야스유키의 난(土岐康行の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메이토쿠(明徳) 2년(1391년) 11개 구니의 슈고를 겸임하며 「로쿠분노이치도노」(六分の一殿)라 불리는 대세력이었던 야마나 씨(山名氏)를 분열시키고, 야마나 도키아키(山名時熙)와 야마나 우지유키(山名氏之) 형제를 일족인 야마나 우지키요(山名氏清)와 야마나 미쓰유키(山名満幸)를 시켜 치도록 하여 몰락시켰다. 나아가 도키아키와 우지유키를 사면하고 우지키요와 미쓰유키를 도발시켜 거병하도록 유인한 다음 그들을 멸망시켜 버렸다. 야마나 씨는 3개 구니만 남게 되었는데, 이를 메이토쿠의 난(明徳の乱)이라고 한다.
2. 2. 슈고 다이묘 오우치 가문
오우치 씨(大内氏)는 백제 성명왕의 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조상으로 칭하며, 스오에 토착한 무사 가문이었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고케닌(御家人) 집안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南朝)에 속했다가 후에 북조(北朝)로 돌아서서 규슈(九州)의 기쿠치 씨(菊池氏) 등과 싸웠다. 막부로부터 스오・나가토・이와미 등지의 슈고직으로 임명되었다.[1]
당주 오우치 요시히로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따라 규슈의 남조 세력과 오랫동안 전투를 벌였고, 부젠의 슈고직도 추가로 받았다. 메이토쿠의 난에서는 크게 활약하여 이즈미・기이의 슈고직을 받았다. 또한 남북조 합일을 알선한 공적도 있어 아시카가 일문으로부터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1]
요시히로는 본거지가 한반도 및 중국 대륙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조선과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조선의 요청으로 왜구(倭寇)를 단속하는데 힘썼으며, 자신의 조상이 백제의 왕자임을 조선에 내세우며 봉지를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조선과의 관계를 중시했다.[1]
스오・나가토・이와미・부젠・이즈미・기이 6개 국의 슈고를 겸하고 교역을 통한 재력도 가진 오우치 씨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경계 대상이 되었다.[1]
2. 3. 요시미쓰와 요시히로의 갈등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연합으로 옹립된 존재였고, 그 권력은 약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쇼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노고쇼를 짓고 권세를 보였으며, 직할군인 호코슈를 증강하였다.
또한 요시미쓰는 유력 슈고 다이묘들에 대한 약체화를 도모하여 고랴쿠 원년(1379년) 호소카와 씨와 시바 씨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실각시키는 고랴쿠 정변을 일으켰다. 고오 원년(1389년)에는 도키 야스유키를 도발하여 거병하도록 부추긴 도키 야스유키의 난을 일으켰다.
메이토쿠 2년(1391년)에는 11개 구니의 슈고들로 이루어진 「로쿠분노이치도노」(六分の一殿)라 불리는 대세력이었던 야마나 씨를 분열시키고, 야마나 도키히로와 우지유키 형제를 일족인 우지키요와 미쓰유키를 시켜 치도록 하여 몰락시켰다. 나아가 도키히로와 우지유키를 사면하고 우지키요와 미쓰유키를 도발시켜 거병하도록 유인한 다음 그들을 멸망시켜 버렸다. 야마나 씨는 3개 구니만 남게 되었다. 이를 메이토쿠의 난이라고 한다.
당시 스오의 슈고 다이묘였던 오우치 씨는 백제 성왕의 아들(이라는 전승이 있는) 임성태자를 가문의 조상이라 칭하며, 스오에 토착한 무사로써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 집안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남북조 시대의 동란에서는 남조에 붙었다가 후에 다시 북조로 돌아서서 규슈의 기쿠치 씨 등과 싸웠으며, 막부로부터 스오・나가토・이와미 등지의 슈고직으로 임명되었다.
당주 오우치 요시히로는 규슈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을 따라 종군하여 규슈의 남조 세력과 오랜 기간 동안 전투를 벌였고, 부젠의 슈고직도 더 받았다. 메이토쿠의 난에서는 크게 분전하여 무공이 두드러졌으며, 이즈미・기이의 슈고직을 받았다. 또한 남북조 합일을 알선한 공적도 있었으며, 아시카가 일문으로부터의 대우도 두터웠다.
요시히로는 자신의 본거지가 한반도 및 중국 대륙과도 가깝다고 하는 지리적인 이점도 살려,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기도 하였다. 요시히로는 조선의 요청으로 당시 한반도 및 중국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에 대한 금압에 힘썼으며, 자신의 조상이 백제의 왕자임을 조선에 내세우며 조선에 봉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조선과의 연고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스오・나가토・이와미・부젠・이즈미・기이 6개 구니의 슈고를 겸하고 교역을 통한 재력도 가지고 있는 강대한 오우치 씨의 존재는 쇼군 전제 권력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미쓰에게 있어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갔다.
오에이 원년(1394년) 요시미쓰는 쇼군직을 자신의 적남 요시모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정대신의 지위에 올랐다. 물론 실권은 그대로 요시미쓰가 장악하고 있었다. 오에이 2년(1395년)에는 태정대신직을 사임하고 출가하여 도의(道義)라는 법명으로 자처하였다. 여러 다이묘, 구게들은 저마다 이를 따라 출가하였으며, 요시히로 역시도 출가를 택하였다.
이 무렵까지는 요시미쓰와 요시히로의 관계는 양호하였으나, 오에이 4년(1397년) 요시미쓰가 저택 호쿠잔다이를 짓기 시작하면서 여러 다이묘들에게 인력 공출을 요구하였는데, 다이묘들 가운데 요시히로만은 「무사는 (쇼군의 저택이나 지을 인력이 아니라) 활과 화살을 가지고 봉공하는 자」라며 이를 듣지 않았고, 요시미쓰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해 말에 요시히로는 쇼니 씨에 대한 토벌을 명받았는데, 지쿠젠에서의 전투에서 동생 미쓰히로가 전사하였음에도 그 아들에 대한 은상 처리가 없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또한 '요시미쓰가 뒤로 쇼니 씨와 기쿠치 씨에게 요시히로를 치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오에이 5년(1398년)에 일본으로 온 조선 통신사들로부터 요시히로가 막대한 물품을 받았다는 것을 시바 요시유키 등이 「요시히로가 조선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요시미쓰에게 참언하였으며, 요시히로는 이를 전해 듣고 격노한다.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으면서까지 조선이나 명과의 교역을 추진하고 있던 요시미쓰에게 있어서도 조선과 강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요시히로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요시미쓰는 번번이 요시히로에게 교토로 올 것을 재촉하였는데, 「쇼군이 요시히로가 가진 이즈미, 기이의 슈고직을 박탈하려 한다」「요시히로는 상경하는 대로 주살될 것이다」라는 소문이 나돌아 요시히로는 불안해하였다. 초조해하던 요시히로는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을 중개한 것은 이마가와 료슌이었다. 당시 료슌은 요시미쓰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슈 단다이 직에서 해임되고 도토미・스루가 반국 수호로 좌천되어 있었다.
나아가 요시히로는 앞서 도키 야스유키의 난에서 몰락했던 미노의 도키 아키나오, 메이토쿠의 난에서 멸망당한 야마나 우지키요의 적남 미야타 도키요, 오미의 교고쿠 히데미쓰[3]나 히에이 산・고후쿠지의 중도(衆徒, 승병), 구스노키 씨[4]・기쿠치 씨[5] 등, 옛 남조 세력들과도 연계하여 거병을 결정하게 된다.
3. 경과
요시히로는 가문 중신들과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동생 히로시게는 교토로 가자고 주장했고, 히라이 비젠 뉴도는 막부에 공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반면, 스기 분고 뉴도는 항전을 주장했다. 요시히로는 젯카이 츄신에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며, 간토의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함께 정치를 바로잡고자 한다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요시미쓰는 10월 28일, 요시히로 토벌을 명하는 치벌어교서를 내렸다. 호소카와 요리모토, 교고쿠 다카아키, 아카마쓰 요시노리의 선발대가 교토에서 이즈미로 출발했고, 11월 8일에는 요시미쓰 자신도 도지에 진을 쳤다. 11월 14일, 요시미쓰는 하치만까지 진격했고, 하타케야마 모토쿠니와 시바 요시마사가 이끄는 주력 3만 기가 이즈미로 향했다.
요시히로는 사카이에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고 농성전을 준비했다. 11월 29일, 막부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오우치 군세는 화살을 퍼부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 군세와 야마나 도키아키 군세, 기타바타케 아키야스 군세 등이 격돌하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무렵, 요시히로와 뜻을 같이하던 도키 아키타다, 미야타 도키키요, 교고쿠 히데미쓰 등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도 군사를 이끌고 무사시 후추의 고안사까지 진군했으나, 간토 관령 우에스기 노리사다의 간언으로 진군을 멈추었다.[1]
12월 21일, 막부군은 화공을 가하며 총공격을 개시했다. 오우치 군세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요시히로는 결국 힘이 다해 전사했다. 스기 분고노카미도 전사하고, 히로시게는 항복했다. 사카이는 함락되었고, 아시카가 미쓰카네는 요시히로의 패전 소식을 듣고 가마쿠라로 돌아왔다.[8]
3. 1. 오우치 요시히로의 거병
오에이 6년(1399년) 10월 3일, 오우치 요시히로는 군사를 이끌고 이즈미 국 사카이 포구에 도착했다. 요시히로는 가신 히라이 신자에몬(平井新左衛門)을 교토로 보냈지만, 자신은 가지 않았다.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는 요시히로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요시미쓰는 쇼렌인 몬제키(門跡)인 손도 법친왕(尊道法親王)의 신하였던 이요 호안(伊予法眼)을 사카이로 보내 요시히로에게 교토로 올라올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10월 27일, 요시미쓰는 선승 젯카이 츄신을 사자로 다시 파견했다.
요시히로는 가문 중신들과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동생 히로시게는 요시미쓰의 뜻에 따라 교토로 가자고 주장했다. 히라이 비젠 뉴도(平井備前入道)는 막부에 공손한 태도를 보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조정의 적(朝敵)이 되어 가문이 멸망할 것이라고 요시히로를 설득했다. 반면, 스기 분고 뉴도(杉豊後入道)는 쇼군이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키려 한다며 항전을 주장했다.
요시히로는 젯카이 츄신과 면담했다. 츄신은 요시히로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믿지 말고 교토로 올라와 쇼군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요시히로는 쇼군 가문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이마가와 료슌을 따라 규슈에서 벌인 전투, 메이토쿠의 난, 남북조 합일, 쇼니 씨 토벌에서의 자신의 공적을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군 가문은 이즈미와 기이를 빼앗으려 하며, 몇 년 전 쇼니 씨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동생 미쓰히로의 아들에게 은상을 내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젯카이 츄신은 요시히로의 충절은 숨길 수 없으며, 소문을 믿어서는 안 되고, 미쓰히로의 아들에게 은상이 없는 것은 요시히로가 교토에 오지 않아 포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거듭 교토로 오기를 재촉했다.
이에 대해 요시히로는 간토의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뜻을 같이하여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며, 지금 교토로 가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는 다음 달 2일에 간토와 함께 교토로 가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결국 젯카이 츄신은 설득을 포기하고 교토로 돌아갔다.
군담소설 《오에이키》에 묘사된 요시히로의 모습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고후쿠지에 결기를 촉구하는 아시카가 미쓰카네의 어교서(御教書)가 실제로 전달된 것은 11월 4일이었다. 사카이와 나라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면, 이 서찰은 젯카이 츄신과의 회담 며칠 후에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시미쓰가 실제로 요시히로 토벌군을 보내기 전까지, 요시히로는 요시미쓰와 싸울지 말지 고민했을 가능성이 높다.[6]
젯카이 츄신에게 보고를 받은 요시미쓰는 10월 28일, 요시히로 토벌을 명하는 치벌어교서(治罰御教書)를 내렸다. 즉시 호소카와 요리모토, 교고쿠 다카아키, 아카마쓰 요시노리의 선발대 6천여 기(騎)가 교토의 요도에서 이즈미로 출발했다. 11월 8일, 요시미쓰 자신도 2천여 기를 거느리고 도지에 진을 쳤다. 11월 14일, 요시미쓰는 하치만까지 진격했고, 간레이 하타케야마 모토쿠니와 전임 간레이 시바 요시마사가 이끄는 주력 3만 기가 이즈미로 향했다.
요시히로는 효조(評定)를 열어 작전을 의논했다. 동생 히로시게는 성을 쌓고 이즈미, 기이에 눌러앉아 버티자고 제안했다. 스기 분고 뉴도는 기선을 제압하여 배로 아마자키에 상륙, 하치만의 진으로 돌진해 결전하자고 주장했다. 히라이 비젠 뉴도는 출전은 무익하다며 농성전을 제안했고, 요시히로는 이 계책을 택했다.
요시히로는 목재를 모아 정루(井楼) 48채와 망루 1000여 채를 지어 사카이에 너비 18정(町)에 달하는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고, "백만 기의 군세라도 이 요새를 부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한편으로 요시히로는 전사를 각오하고 자신이 귀의했던 승려들을 초청해 미리 자신의 장례 법요(法要)를 치르게 했다. 또한 스오에 두고 온 어머니에게 유품과 유언을 전하고, 동생 모리하루에게는 분국(分国)을 굳게 지키라고 전했다. 요시히로를 따랐던 자들도 모두 전사를 각오했다.
3. 2. 사카이 공방전
막부군 3만여 기가 사카이를 포위하고, 해상으로는 시코쿠・아와지의 해적중 100여 척이 봉쇄하였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가와치국의 모리구치성에서 싸우고 있던 스기 구로와 가모야마에 배치했던 스기 빗추노카미를 빼어 사카이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요시히로의 군세는 5천여 기가 되었다.
11월 29일, 막부군이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했다. 오우치 군세는 이에 맞서 망루로부터 화살을 퍼부었다. 간레이 하타케야마 모토쿠니의 군세 2천여 기가 북쪽의 이치노 기도(一の木戸), 니노 기도(二の木戸)를 쳐부수고, 산노 기도(三の木戸)까지 치고 들어와 7백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격전이 벌어졌다.
하타케야마 군세에 대해 야마나 도키아키의 군세 5백여 기가 치고 들어갔고, 성내에서는 스기 분고 등 5백여 기가 나와 싸웠다. 요시히로도 2백여 기를 거느리고 이에 합류하였다. 이세의 고쿠시(国司) 기타바타케 아키야스의 군세 3백 기가 야마나 군세에 가세하여 아들 미쓰야스가 전사할 정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호소카와, 아카마쓰 군세 5천여 기는 남쪽 방면에서, 롯카쿠, 교고쿠 군세는 동쪽 방면에서 치고 들어갔다. 전투는 밤까지 계속되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 3. 반(反) 요시미쓰 파의 봉기
그 무렵 요시히로와 뜻을 같이하던 도키 아키타다가 거병하여 오와리로 쳐들어가 미노를 침공하였다. 미노 슈고 도키 요리마스(土岐頼益)는 오우치를 치는 진에 나가 있었는데, 곧장 미노로 돌아가서 아키타다를 쳐부수었다.[1]
미야타 도키키요도 요시히로에게 동조하여 단바로 쳐들어가 교토로 침입해 화공을 행했고, 3백여 기로 하치만의 막부군 본진을 목표로 돌진하였다. 도키키요의 군세는 막부군의 진을 차례대로 무찔렀지만 힘이 다해서 퇴각하여야 했다.[1]
교고쿠 히데미쓰는 오미에서 거병하여 교토로의 침공을 도모하였다. 미이데라(三井寺)의 주도(衆徒) 5백 명이 세타 다리를 불태우고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데미쓰는 부득이하게 모리야마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오우치 요시히로를 치는 진에 가담하고 있던 교고쿠 군세 1천여 기가 돌아와 모리야마를 공격하자 히데미쓰는 도키 아키타다와 합류하고자 미노로 향했지만 도중에 쓰치 잇큐(土一揆)의 봉기와 맞닥뜨려 궤주하였고, 히데미쓰는 주종 2기와도 떨어져 행방이 묘연해졌다. 덧붙여, 히데미쓰의 관직이 사에몬노이(左衛門尉)로 당풍으로 금오(金吾)였던 데에서 이 거병만을 '''금오 소동'''('''金吾騒動''')이라고 부르고 있다.[1]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는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무사시 후추의 고안사(高安寺)까지 진군하였는데, 간토 관령 우에스기 노리사다(上杉憲定)의 간언으로 진군을 멈추었다.[1]
3. 4. 사카이 함락과 요시히로의 죽음
사카이에서는 막부군의 총격전을 격퇴한 오우치 세력이 의기를 돋우고 있었다. 그러나 막부군은 화공을 계획하고 좌의장(폭죽)을 준비해 길을 닦고 12월 21일 이른 아침에 총공격을 개시한다. 막부군은 강풍을 타고 성 안으로 화공을 가했고, 망루를 쓰러뜨리고 격렬하게 치고 들어갔다.
스기 빗추노카미는 그 날이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라 각오하고 야마나 미쓰우지[7]의 진으로 돌격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보던 요시히로는 중국의 항우를 따라 자신도 후대에 남을 장렬한 최후를 맞으리라 결의하였다. 요시히로는 막부군의 북측의 진으로 쳐들어가서 큰 칼을 휘두르며 분전하였다. 간레이 하타케야마 모토쿠니의 적자인 미쓰이에의 군세 2백 기가 이에 도전하였고, 요시히로는 좋은 적이라며 불과 30기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때 이와미 사람 2백 기가 막부군에 내응해버렸다. 격노한 요시히로는 이와미 군세에 공격을 가했고, 공포에 질린 이와미 군세는 도망쳐버린다.
요시히로는 거듭 미쓰이에를 죽이려고 싸워 나갔고, 막부군은 이를 에워싸고 공격했다. 요시히로의 군세는 차츰 그 수가 줄어갔고, 모리 민부승(森民部丞)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모리 민부승은 요시히로를 지키며 적진으로 쳐들어가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홀로 남게 된 요시히로는 미쓰이에를 노리고 계속해서 싸웠지만 포위 속에서 마침내 힘이 다해, 「천하에 비길 데 없는 명장인 오우치 요시히로 뉴도(入道)가 여기 있다. 나를 죽여서 쇼군에게 보여라」라고 큰 목소리로 일갈하고 전사하였다.
남쪽 방면을 굳게 지키고 있던 스기 분고노카미는 요시히로가 전사하였다는 것을 알고 적진으로 돌격해 싸우다 전사하였다. 동측을 지키고 있던 히로시게는 이마가와 군세나 잇시키(一色) 군세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는데 병력도 줄어들어 자해하려 했으나 히라이 비젠 뉴도가 말리며 항복을 권했고 히로시게는 이에 따랐다. 그 밖에 다른 오우치 세력들도 무너져 전사하거나 자결, 사카이는 함락되었다.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는 무사시(武蔵) 후추(府中)로부터 시모쓰케의 아시카가 장(足利荘)[8]까지 진군하였으나, 요시히로가 패하고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4. 전쟁 이후
1400년(오에이 7년) 3월,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미쓰카네는 이즈 미시마 신사에 원문을 봉헌하고 "소량으로" 막부에 두 마음을 품었던 것을 사죄했다. 미쓰카네를 모반으로 유인했던 이마가와 료슌은 막부로부터 토벌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상경하여 사죄하고 목숨을 건졌다. 단, 도토미 국·스루가 국 수호직은 빼앗겨 조카인 이마가와 야스노리에게 주어졌다. 이후 료슌은 정치 활동은 하지 않고 와카, 렌가에 몰두하게 된다.
그 후의 논공행상에서 요시미쓰는 오우치 씨의 분국 이즈미 국, 기이 국, 이와미 국, 부젠 국을 몰수했다. 이즈미는 니키 요시카즈, 기이는 하타케야마 모토쿠니, 이와미는 교고쿠 다카아키, 스오 국·나가토 국은 항복한 오히로시게에게 주었다. 그러나 스오·나가토의 본거지를 지키고 있던 오히로미는 이에 따르지 않고 저항했다. 오히로시게는 막부의 원군과 함께 오히로미를 공격하여 이를 추격했지만, 1401년(오에이 8년)에 규슈에서 오히로미는 다시 거병했고, 수차례의 전투 후 오히로시게는 사카리 산성(현재의 시모노세키시초후)에서 멸망했다.[9]
오히로미는 더 나아가 아키, 이와미까지 세력을 뻗쳤다. 막부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1405년(오에이 12년)경에 오히로미에게 스오·나가토의 수호직을 주고, 게다가 부젠·지쿠젠 국의 수호까지 더하여 겨우 귀순시켰다. 이렇게 해서 한때 몰락할 뻔했던 오우치 씨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5. 오에이키(応永記)
오에이의 난에 대한 내용은 군기물어(軍記物語)인 오에이기(応永記, 별명 『오우치 요시히로 퇴치기』)에 기록되어 있다.[2] 작자나 성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난이 끝난 직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별칭과 같이 막부(아시카가 요시미쓰) 측의 시점에서 기록되었지만, 난에 대한 사료로서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사본으로 『사카이키(堺記)』가 있다.
6. 오에이의 난을 다룬 작품
古川薰|후루카와 가오루일본어가 1980년에 발표한 소설 《炎の塔 小說大內義弘|화염의 탑 - 소설 오우치 요시히로 -일본어》는 오에이의 난을 다룬 작품이다.
참조
[1]
서적
義弘期大内氏の分国支配について
同成社
2007
[2]
웹사이트
応永記 とは
https://kotobank.jp/[...]
[3]
문서
이즈모 슈고(出雲守護) 교코쿠 다카아키라(京極高詮)의 동생이다.
[4]
문서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손자로 알려진 구스노키 마사카쓰(楠木正勝)와 그 두 아들 마사모리(正盛)・마사아키(正堯) 형제이다. 마사모리는 후에 마사아키(正顯)로 이름을 바꾸었다.
[5]
문서
기쿠치 히젠노카미(菊池肥前守)라고 하는데, 기쿠치 다케아키(菊池武照) 또는 기쿠치 가네토모(菊池兼朝)이다.
[6]
서적
義弘期大内氏の分国支配について
同成社
2007
[7]
문서
가와구치 미쓰우지(河口満氏)라고도 하며, 우지키요의 아들로 미야타 도키키요의 동생이다.
[8]
문서
일본 도치기 현(栃木県) 아시카가 시(足利市).
[9]
문서
일본 시모노세키 시(下関市) 조후(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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